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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마음책방

[저만치 혼자서] by 김훈

by 개미마음 2024. 11. 22.

 

 

 

1. 명태와 고래

 

p16.

이춘개는 아침 아홉시에 북부 제3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간첩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십사 년을 선고받고 십삼 년을 복역한 뒤 삼일절 특사로 잔여 형기 십 개월이 사면되었다. 만기 출소나 별 차이 없었다.

 

p45.

전시 기간은 일주일이었는데, 이춘개는 전시회가 끝나는 날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춘개는 여인숙 주인에게 두 달 치 숙박비를 미리 지불했고, 포구 안 음식점에 외상값은 없었다. 이춘개가 쓰던 방에서는 붓 한 자루와 벼루, 그림을 그리다 만 화선지 몇 장, 현금 삼천원과 옷가지 몇 점이 나왔다.

 

p46.

이춘개가 죽은 해 겨울에 명태가 많이 잡혔다. 명태는 물결처럼 밀려내려왔다. 먼바다에서 고래들이 솟구치며 연안으로 다가왔다.

 

2. 손

 

p53.

나는 사내에게 목례를 보냈다. 사내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크고 흐린 눈이 뒤로 물러서는 듯하면서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내 눈도 겁에 질려 있을 것이다. 나는 얼굴의 화장이 들뜨는 느낌이었다. 사내는 철호가 강간한 여자아이의 아버지였다. 그 사내도 나처럼 참고인으로 불려온 참이었다.

 

p55.

이혼한 남편은 전남편이지만 교도소에 간 아들은 전 아들이 아이었다. 아들이 전 아들이 아니므로 이혼한 남편도 전남편이 아닐 것이었다. 칼로 치듯이 잘라낼 수 있는 과거는 없다. 지워지지가 않고 아니라고 우겨지지가 않는다.

 

p59.

새로 이사가는 집에서도 가끔씩 남자 구두가 필요할 테니까, 싼 것으로 한 켤레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남편의 구두도 아니고 아들의 구두도 아닌, 아무도 신지 않았고 앞으로 아무도 신지 않을 무인칭의 구두, 태어나지 않은 남자의 구두를 말이다.

 

3. 저녁 내기 장기

 

p92.

젊은 약사는 이춘갑을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아버님' 소리를 듣는 순간 이춘갑은 시야가 흔들렸고 시간이 뒤섞였다. 눈앞의 것들이 멀어지고 뿌연 공간 안에서 먼 것들이 돋아났다. '아버님'이라니...... 이춘감의 시야는 자신의 생명이 아버지의 정충이었던 시절까지 거꾸로 더듬어갔으나 아무것도 걸리는 것은 없었다. '아버님'이라니....

이춘갑은 외환위기 때 이혼했다.

 

p93.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개표하던 새벽에 당선자의 지지자들이 세종로 네거리로 몰려와서 끌어안고 울면서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남행열차>도 불렀다. 애국적 시민들이 금을 모아서 나라를 살리자고 금붙이를 들고 거리로 나와서 긴 줄을 이루었다. 이춘갑은 그때 공장을 팔아서 은행 빚과 밀린 임금을 정리하고 사업을 접었다.

 

p95.

이춘갑은 오개남과 사흘째 장기를 두고 있었다. 오개남은 겨우내 오리털 파카에 등산화를 신고 귀덮개가 달린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장기판에 모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개 비슷했다.

 

p96.

이춘갑은 오개남을 처음 보았을 때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애를 살아온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아마도 오개남의 그 시큼한 몸냄새 때문인 것도 같았다.

 

p120.

다음날, 김영자는 화장되었고, 오개남은 옥탑방으로 이사했고, 오개남의 개는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공원 앞 유기견 센터 철망 안에 갇혀 있었다. 이춘갑은 오후에 공원 장기판에 나왔다. 오개남은 짐을 정리하느라고 공원에 나오지 않았다. 이춘갑은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비집고 안약을 넣었다.

 

4. 대장 내시경 검사

 

p123.

대장 내시경 검사를 삼 년에 한 번씩 받고 있는데, 금년이 세번째다. 금년부터는 검사 규칙이 바뀌어서 칠십 세 이상 고령자가 내시경 검사를 수면으로 하려면 보호자와 함께 와야 한다고 병원에서 핸드폰 문자로 알려왔다. 보호자는 반드시 가족일 필요는 없고, 검사 끝나고 회복실에 머무는 한 시간 정도 침대 옆을 지키고 있다가 귀가할 때 마취가 덜 깨서 어지럼증이 남아 있다면 부축해주라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p125.

전처와 살 때는 사소한 일로 자주 다투었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의 다툼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았고, 무의미한 것들이 쌓여서 무의미하지 않았다. 화해하려는 노력이 더 큰 싸움을 일으켰다. 그 여자의 결론은 '지겹다'는 것이었고, 나는 나의 지겨움으로 그 여자의 지겨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5. 영자

 

p149.

노량진 고시텔은 십층짜리 주상복합건물에 있었다. 일층은 박리다매형 대형 식당과 편의점, 약국, PC방 등이 세 들었고 이층 삼층은 거의가 9급 행정직, 9급 법원직, 9급 세무직, 9급 경찰직, 9급 소방직, 9급 보건직 시험 학원의 강의실이었다. 사층부터 십층까지는 삼 평이나 사 평짜리 원룸인데, 입주자들은 모두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었다. 노량진에는 대로변이나 뒷골목에 이런 고시텔들이 수십 동 들어서 있어서 끼니때마다 식당 앞에 늘어서는 긴 줄이 노량팔경 중 제1경을 이루었다. 9급의 풍경이었다.

 

p150.

나는 그 고시텔에서 영자와 일 년 동안 동거했다. 그때 나는 9급 지방 행정직 시험에 재수하고 있었고, 영자는 9급 지방 보건직 시험에 재수하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합격해서 경상북도 내륙 산골 마장면 면사무소로 내려왔고 영자는 또 떨어졌다. 영자가 지금 노량진에서 삼수하고 있는지, 노량진을 떠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p162.

저녁 여섯시 무렵에 노량진에서는 각자, 저마다, 혼자서 시장했는데 다들, 너나없이 골고루 시장했다. 시장기는 개별적이면서 전체적이었고, 보편적이면서 고립무원이었다. 거리 전체가 시장했지만 수많은 시장기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p169.

나는 면사무소 총무계에 배치되었는데 일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이것저것 다 했다. 가축전염병 예방주사를 신청하는 공문을 작성해서 축협으로 보냈고, 오십 시시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돌면서 공가 상태를 점검했고, 출향해서 도회지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거주지를 분기별로 확인해서 여당 지구당 사무실에 보고했고, 산불 조심 팻말을 밭두렁에 박았고, 마을 경로잔치 때 면장의 축사를 썼다.

 

6. 48GOP

 

p187.

48GOP는 중부전선의 서야강 남안에 있다. 소속 중대는 남방한계선에서 서남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170고지의 북쪽 사면에 본부를 두고 GOP 세 개를 운영하고 있다. 서야강은 남북 양안이 철책으로 막혔고 종전 후 오십 년 동안 고깃배 한 척 지나가지 않았다.

 

7. 저만치 혼자서

 

p217.

마가레트는 죽어가는 자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의 궤적을 묻지 않았다. 마가레트는 죽어가는 자들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씻겨서, 구원이나 인도가 아니라 동행의 방식으로 임종까지 함께 가서 망자들을 배웅했다. 망자들이 숨을 거두고 나면 마가레트는 늘 기도했다.

 

p128.

수녀들이 노후를 의지할 곳이 없어서 교회는 오래 걱정했다. 교구청은 철새가 돌아오는 충청남도 바닷가에 호스피스 수녀원을 설립하고 늙은 수녀들을 모셨다. 교구청은 이 수녀원의 이름을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라고 지었는데 죽음을 보편적인 자연현상 속에 내던져버리지 않고 죽어가는 자들을 하나씩 개별적으로 씻기고 달래서 경계까지 동행한 마가레트 수녀의 그 한없이 낮은 뜻을 기리는 이름이었다. 이름을 지은 김요한 주교는 혼자서 만족했다. 죽음이 죄의 대가라 하더라도 세상의 한없는 죄와 죽음을 우형별로 나누어 개념화하거나, 세상의 저울로 달아서 무겁고 가벼움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심은 인류 전체의 보편성이나 추상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살아 있는 구체적 존재에 대한 개별적 사랑이라야 마땅하므로 마가레트 수녀의 생애는 사랑의 구체성, 개별성, 직접성을 실현함으로써 인간의 힘으로 섭리를 증명한 것이라고, 김요한 주교는 축성미사 강론 때 수녀원 이름을 지은 배경을 설명했다. 십 년 전의 일이다.

 

<김훈의 「명태와 고래」의 관한 군말>

2010년에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이영조)는 광복 이후 전쟁과 분단, 개발독재와 군부독재, 유신과 쿠데타의 시대를 거치면서 벌어진 학살과 고문, 인권침해의 사례들을 조사한 결과를 '종합보고서'로 발간했다. 진실 규명을 신청한 건수는 1만 8백60건이었고 이중 7천9백22건(73%)은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이었다. 현장 조사와 관련자 조사 과정을 모두 수록한 보고서의 분량은 방대했다. 이 보고서는 곧게 찔러 들어가는 문장으로 학살과 고문의 현장으로 거침없이 다가섰다. 이 보고서는 디테일을 존중해서 세밀히 살폈고, 증명되는 것과 증명되지 않는 것을 구별했다.

이 보고서가 증언하고 있는 범죄는 모두가 군대나 경찰 그리고 검찰과 법원에 의해 자행된 국가 범죄였다. 기소와 재판과 선고의 사법절차를 모두 거친 합법적 학살도 많았다.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 수십 년 지나 무죄로 판명되기도 했는데, 그 사건의 기소와 재판을 담당했던 수사관과 법관들은 그때 일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1948년생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시설을 거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 보고서에 수록된 대부분의 학살과 고문은 모두 나의 삶과 동시대에 벌어졌던 야만 행위이다. 나의 시대에 폭력은 일상화되고 제도화되어 있었다. 정권은 이권과 다름없었고, 정치권력과 군사력에 의한 폭력과 행정 권력, 경제 권력에 의한 폭력이 겹쳐 있었고, 이념이라는 미신이 세상의 꼭대기에서 모든 폭력을 총괄했다. 이 제도화된 폭력은 그 야만 행위를 자행하는 자와 피해자와 방관자들의 인간성을 심대하게 파괴했고 그 시대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나는 그런 시대에 태어나서 자랐고 밥을 벌어 먹었다.

「명태와 고래」는 이 보고서를 읽은 후에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쓴 글이다. 나는 감정을 글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쪽과 북쪽의 폭력에 의해 번갈아 짓밟히고 제 땅에서 추방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쓰려고 했다. 짓밟힌 사람이 다시 삶을 추슬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했다.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

 

<김훈의 「손」의 관한 군말>

오영환 소방사의 글을 읽고 나서 나는 그에게 전화를 해서 그 때의 손의 느낌을 더 자세히, 더 육감적으로 말해보라고 다그쳤는데 그는 간절한, 강력한, 따스한, 세 마디를 반복할 뿐이었다. 글은 삶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손은 여전히 나의 소중한 테마다. 노동하는 손, 사랑하는 손, 쓰다듬는 손, 주무르는 손, 주는 손, 받는 손, 부르는 손, 보내는 손, 기도하는 손, 연장을 쥐는 손, 악기를 쥐는 손, 무기를 쥐는 손, 고운 손, 부르튼 손, 그리고 이 세상의 수많은 손잡이에 남아 있는 손들의 자취와 표정에 대해서 나는 쓰고 싶다. 나의 '손'은 오영환 소방사의 '손'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손'이라는 제목은 내 마음에 든다.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이 적절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 보지 못한다. 언론보도에 의해 가늠할 뿐이다.

각 편의 화자들은 모두 저만치 혼자있다. 손을 내밀 수 없는 곳에 있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슬픔이 일상 같았다.